학생이 과제를 작성할 때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교수는 AI 사용을 제한해야 할까,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가르쳐야 할까. AI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코드를 만들며 학생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기존의 강의와 과제, 평가방식은 그대로 유지해도 될까.
생성형 AI가 대학 교육에 들어오면서 학생과 교수 모두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장준호 교의 [AI 중심 대학]은 이러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책의 관심은 학생에게 AI 사용을 허용할 것인지 금지할 것인지에 머물지 않는다. AI가 지식의 탐색과 설명, 활용을 지원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대학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학생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교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나아가 학과와 전공 중심으로 구성된 대학의 구조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AI 활용의 문제에서 출발해 대학 교육의 본질과 구조로 논의를 확장하는 것이다.
AI는 대학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한다
장준호 교수는 현재 대학이 겪고 있는 혼란을 교육의 역사적 변화와 연결한다. 산업혁명 이후 공교육은 표준화된 집단 교육 체계로 자리 잡았고, 대학은 학과와 전공을 중심으로 전문지식을 가르치며 학위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형성해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과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이러한 교육체계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 AI의 등장은 새로운 변화를 더한다. 과거에는 지식을 배우고 기억하며 그것을 필요한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제 학생은 생성형 AI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찾고 설명을 들으며 글과 코드의 초안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은 AI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을 학생에게 반복해서 훈련하는 데 머물러야 하는가. [AI 중심 대학]은 이 문제를 통해 대학 교육의 목적을 다시 생각한다.
AI 시대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학생이 AI를 활용하면서도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생각하며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가상의 하버스톤 대학교에서 대학의 미래를 실험하다
[AI 중심 대학]의 특징은 저자가 미래 대학의 모습을 이론이나 정책 보고서의 형식 대신 ‘하버스톤 대학교’라는 가상의 미국 대학을 만들고, 이 대학이 AI 중심 대학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는 대학의 위기 진단에서 시작한다.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확인한 대학은 AI 에이전트를 활용한 새로운 교육방식을 탐색하고 파일럿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컴퓨터과학과와 철학과, 예체능 분야에서 새로운 학습방식을 실험하고 교수진도 변화에 직면한다.
이후 변화는 교육방법을 넘어 대학의 구조로 확대된다. 학과의 경계가 흔들리고 학생의 학습방식이 달라지며 행정과 물리적 공간, 교수 배치까지 변화한다. 그 과정에서 AI 의존과 윤리적 딜레마 같은 새로운 문제도 나타난다.
독자는 하버스톤의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AI를 대학에 적용할 때 무엇이 가능하고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모든 학생에게 같은 교육과정이 필요한가
책에서 AI 에이전트는 미래 대학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도구로 등장한다. 저자가 구상하는 대학에는 과목 담당 에이전트와 학습 인프라 에이전트가 있다.
과목 담당 에이전트는 교수의 강의방식과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학생의 질문에 답하고 학습을 지원한다. 학습 인프라 에이전트는 학생의 학습 이력을 바탕으로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개인별 학습 경로를 설계한다. 이 구상의 핵심은 학생마다 다른 학습과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학에서는 같은 전공의 학생들이 대체로 정해진 교육과정을 따라간다. 반면 저자가 제시하는 AI 중심 대학에서는 학생의 관심과 학습 이력, 필요한 역량에 따라 서로 다른 학습 경로를 구성할 수 있다. AI는 표준화된 교육을 개인화된 교육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학습 인프라로 활용된다.
학생의 학습이 달라지면 전공의 의미도 달라진다
개인화된 학습은 학과와 전공의 문제로 이어진다. 현실의 문제는 하나의 학문 영역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기술과 경제, 사회와 윤리가 서로 연결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러 분야의 지식을 함께 활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AI 에이전트가 학생의 관심과 학습 목적에 따라 여러 분야의 학습을 연결할 수 있다면 현재와 같은 학과와 전공 중심의 대학 구조 역시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책의 제5장이 ‘구조의 해체’라는 제목 아래 ‘경계의 붕괴’와 ‘학과 소멸의 시작’을 다루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대학에서 학과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 자체가 아니다. 이 책이 던지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의 교육과정을 학과와 전공을 중심으로 설계할 것인가, 학생이 해결하려는 문제와 키워야 할 역량을 중심으로 설계할 것인가에 있다.
하버스톤 대학교의 구조 변화는 이 두 가지 교육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미래 시나리오다.
교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다
AI가 학생에게 필요한 지식을 설명하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교수는 무엇을 해야 할까. [AI 중심 대학]은 AI 시대에 교수의 역할이 사라진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AI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확대될수록 인간 교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더 분명해져야 한다고 본다.
책에서 교수 지원 에이전트는 반복적인 질문에 답하거나 채점 업무를 지원한다. 이를 통해 교수는 학생과 직접 만나 상담하고 학습을 설계하는 교육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책의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제4장은 ‘교수진의 전환’을 다루고, AI 활용이 본격화된 뒤인 제7장에서는 다시 ‘인간 교수의 재발견’을 다룬다. AI가 교수의 역할을 대신하는가보다 AI와 인간 교수가 각각 무엇을 맡아야 학생의 학습이 더 나아질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의 일부를 AI가 담당한다면 교수는 학생의 사고를 이끌고 학습을 설계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이 탐색하는 방향이다.
AI 시대에는 어떤 역량을 가르쳐야 하는가
이러한 논의는 결국 대학이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장준호 교수는 세 가지 역량을 제시한다.
첫째는 AI 협업 리터러시다. 다양한 AI 기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이다.
둘째는 문제 발견 능력이다. 이미 주어진 문제의 답을 찾는 데 머물지 않고 복잡한 상황에서 무엇이 실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를 찾아내는 역량이다.
셋째는 윤리 감수성이다. AI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사용해도 되는지를 구별하고, 기술의 활용이 가져올 영향을 고려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 세 가지 역량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AI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무엇을 해결하려는지 먼저 판단해야 하고, AI가 제시한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결과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생각한다면 윤리적 판단도 필요하다.
AI와 협업하면서도 문제를 발견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학생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이것이 [AI 중심 대학]이 교육과정에 던지는 핵심적인 문제다.
AI가 중요해질수록 생각하는 힘이 중요해진다
‘AI 중심 대학’이라는 제목은 자칫 대학의 모든 교육과 업무를 AI 중심으로 재편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중심에는 AI 자체가 놓여 있지 않다. 저자는 AI를 도구로 규정하고 교육의 본질은 언제나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AI 중심 대학은 AI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학과 다르다. AI가 할 수 있는 일은 활용하면서 학생에게 어떤 학습 경험을 제공할 것인지, 무엇을 스스로 생각하게 할 것인지,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다시 검토하는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이 AI의 가능성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AI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제와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고, 다시 인간 교수의 역할을 돌아본다.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것과 좋은 교육을 만드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책의 서사 안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대학 전체가 함께 변해야 한다
AI로 인한 교육의 변화 또한 강의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학생의 학습방식이 달라지고 교수의 역할과 학과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대학의 운영체계도 영향을 받는다.
책의 제6장은 ‘실행의 시작’이라는 제목 아래 행정의 변화, 물리적 변화, 교수 재배치, 신입생 맞이와 파일럿 클러스터 가동을 다룬다. 이는 AI 중심 대학을 몇몇 교수의 새로운 수업방식이나 AI 도구의 도입으로 한정하지 않는 책의 관점을 보여준다.
교육과정을 바꾸려면 교수의 역할과 조직 구조, 행정과 공간까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 결국 AI 시대 대학의 변화는 기술 도입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교육과 조직을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다.
하버스톤은 하나의 미래 대학 모델이다
[AI 중심 대학]에서 그려지는 하버스톤 대학교는 실제 대학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별 AI 에이전트, 학과 경계의 해체, 교수 역할의 변화와 같은 책의 제안을 모든 대학이 따라야 할 완성된 설계도로 읽을 필요는 없다. 저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각 대학이 가진 역사와 철학, 지역적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가상의 대학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미래 대학의 여러 가능성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게 한다. 현재의 제도와 조직을 그대로 전제하지 않고 학습의 목적에서 출발해 대학을 다시 설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스톤의 모든 선택에 동의할 필요도 없다. 이 대학의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현재 대학에서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바꿀 것인지, AI에게 무엇을 맡기고 인간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AI를 통해 대학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뒤 대학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AI 사용에 집중되었다. 학생에게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과제와 시험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교수는 어떤 AI를 활용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는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과제다.
[AI 중심 대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대학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학생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공과 학과는 학생의 학습을 조직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인가.
AI의 등장은 이러한 오래된 문제를 다시 꺼내놓는다. 책에서 AI는 대학 교육의 새로운 목적이 아니라 대학이 교육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계기다. 따라서 AI 중심 대학의 핵심도 기술에 있지 않다. 학생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목적을 위해 AI와 교수, 교육과정과 대학의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데 있다.
[AI 중심 대학]에서 장준호 교수는 소설 형식으로 가상의 하버스톤 대학교가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화된 학습, 전공의 경계를 넘는 교육, AI 에이전트의 활용, 교수 역할의 전환과 대학 구조의 변화를 탐구한다. 동시에 AI 의존과 윤리적 딜레마를 살펴보며 인간 교수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이 모든 논의가 향하는 곳은 결국 교육의 본질이다. AI가 지식의 탐색과 활용을 지원할 수 있게 될수록 대학은 학생이 문제를 발견하고 생각하며 판단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AI를 중심에 놓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이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는 중심은 결국 학생의 배움과 생각하는 힘이다. © 연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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